중국/내몽고(네이멍구)

내몽고 공정여행 이야기 3 - 초원의 오보, 북경의 전통

Lovecontents 2011. 8. 16. 14:29

2일차 이야기 중에 빼먹은 것이 있다.

몽고족 민가를 방문한 후 우리 부부는 묵고 있는 게르 뒤쪽 언덕의 오보에 올랐다.

오보는 몽고족의 서낭당 같은 곳이다.

사는 지역의 가장 높은 언덕(그야말로 야트막한 언덕!)에 돌탑을 세워놓고 룽다를 꽂아놓았다.

 

<오보의 모습. 어딘지 모르게 우리의 서낭당의 느낌과 닿아있다.>

 

몽고는 우리와 샤머니즘을 나누는 친족 관계에 있다.

샤먼은 하늘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존재, 당연히 나무나 탑 같은 것을 쌓아놓고 신과의 접촉을 꾀한다.

형형색색의 깃발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가 되려는 초원의 갈망이 느껴져 온다.

나즈막한 언덕 위지만 사방으로 트여있다.

날씨만 더 맑았더라면 태어나서 가장 멀리 바라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자욱한 안개 때문에 시야가 가리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이렇게 끝도 없는 벌판 위에 서 볼 기회가 또 있을까>

 

이런 공간에서 살아가니 몽고 사람들의 시력이 3.0에서 8.0에 이른다는 설이 나오는 것일테다.

한 마디로 매의 눈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몽고의 사례는 아니지만,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화를 보면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아랍 마른 초원 위에 영국군 로렌스가 아랍 가이드와 함께 서 있는데 갑자기 그 아랍인이 총에 맞아 쓰러진다.

로렌스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참이 지나자 먼지를 일으키며 베두인 전사(오마 샤리프 분)가 나타난다.

그가 백인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총을 쏴서 가이드를 쓰러뜨린 것이다.

광야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시야와 문명을 살아가는 사람의 시야를 극적 대비를 통해 보여주는 명장면이었다.

오보가 있는 언덕에서 그 생각을 했다.

이곳 몽고인들이라면 내가 보지 못하는 저 먼 지평선의 작은 움직임도 포착할 수 있겠지, 하는.

문명의 눈과 초원의 눈의 차이, 근시안적 문명과 비전을 가지는 자연의 삶에 대해서.

 

3일째 아침이 되어도 비가 완전히 개질 않는다.

내몽고 초원에서 이틀을 비와 지냈다.

떠나는 날까지 비가 쫓아다니다니.

기획자인 최정규 작가는 결단을 내려 일찍 초원을 떠나기로 했다.

가는 길에 점심을 들고 북경(베이징)에서 한 군데를 더 들려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 공정족들은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로 초원을 떠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마음 속으로는 초원과 이별하기 어려웠으나 짜여진 일정을 어기고

맑은 하늘을 보기 위해 하루 더 묵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북경에 가까워 올수록 휴게소도 깨끗해지고 시설도 좋아졌다.

북경 근처의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었다.

 

<북경 근처 휴게소 풍경. 중국 북방의 산들은 건조한 기후 때문에 산이 그리 푸르지 못하고 흙산처럼 보였다.>

 

최작가가 우리를 달래려고 비싼 코스 요리를 시켜주었다.

사람이란게 참 단순해서 맛난 걸 먹으면 그래도 기분이 좀 나아지게 마련 아닌가.  

다들 시원한 식당에서 식사를 나누고 기운들을 차리기 시작했다.

 

북경에 오니 날씨가 좋아지고 있었다. (이런!)

북경에서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종루와 고루였다.

시간을 알리고 통금을 알리던 종과 북이 있는 누각.

역시 중국 것은 뭐든지 크다.

종루와 고루도 규모가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고루에 올랐는데, 철저한 계획도시인 북경의 모습을 잘 살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고루에서 내려다본 북경의 모습>

 

다행히 시간이 맞아서 고루의 북을 치는 간단한 공연도 볼 수 있었다.

그닥 인상적인 공연은 아니었고 고루의 북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매개는 되었다.

우리 말고 백인 관광객들이 상당히 많이 같이 있었다.

이미 이곳이 서양에는 자금성이나 천안문 광장 못지 않는 코스가 된 듯 싶었다.

 

<고루의 공연 모습. 외국인 관광객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원래 우리가 방문하려던

후퉁. 즉 청대 전통 주거지 거리로 향했다.

우리로 따지면 경북궁 근처 안국동, 북촌 마을 같은 곳이다.

그곳의 연대사가라는 거리는 인사동 거리와 같은 곳이고.

(후통의 어원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나 우리말의 고샅, 즉 골목을 의미하고,

연대는 담뱃대를 말한다. 연대사가란 담뱃대를 팔던 기울어진 길이란 뜻으로 보는 게 무난하겠다.)

 

<우리의 인사동 거리에 해당하는 연대사가(옌따이시에지에)의 패루>

 

이 거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언급하고 있어서 여기서 덧붙일 필요가 없다고 본다.

우리는 거리 구경도 하고 쇼핑도 했지만

후통에 남아있는 사합원(쓰허위엔)을 찬찬히 둘러본 것이 더 가치 있었다.

사합원은 중국의 전통 주택 축조 양식으로, 동서남북으로 방과 거실을 배치해 'ㅁ'자 형태를 이룬 것을 말한다.

마당을 중심으로 북쪽 방과 거실(남향)에 큰 어른이 살고, 남쪽 방(북향)에 일꾼들이 산다.

동쪽과 서쪽에 각각 남자 식솔과 여자 식솔이 거주한다.

밖에서 보면 완벽히 폐쇄적인 공간이 된다.

거의 완벽한 내부지향적 공간이다.

우리 전통 고택들이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고 사랑채를 대외적으로 개방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실제로 사합원에 들어가니 대단히 폐쇄적인 느낌어어서

우리의 전통 고택의 사랑방 손님 같은 이미지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사합원 마당의 모습. 독인 관광객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그래서 중국 전문기자 유광종 같은 사람은 <연암 박지원에게 중국을 답하다>라는 책에서

중국 문화의 핵심을 '담'의 문화로 파악하기도 한다.

사합원의 형태부터 파티션이 높고 촘촘히 쳐져 있는 중국의 사무실, 가족주의 기업 운영, 문명을 가르는 만리장성  등

폐쇄적이고 내부 지향적인 중국의 특성이 건축물에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담을 넘으려면 필연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꽌시(관계)'가 필요하다.

꽌시 없이는 중국인의 웅장한 담을 넘을 수 없다.

그리고 개인의 이런 담을 넘나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현실적 상상력, '공격과 방어'의 계산성이 빨라야 할 것이고

그것이 중국인 특유의 현실성이나 계산성을 일구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수없는 전란과 이방민족의 침탈, 억압 속에서 이런 성향들이 발달했을 것이다.

살아가는 풍토와 환경이 어떻게 민족성과 연결되는지 잘 알 수 있는 계기였다.

 

그 전통 가옥들 중 하나를 방문해서 그 집에서 해주는 밥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거기서 만두 빚기 체험을 했는데, 우리는 집안이 평양이라 명절마다 늘 만두를 빚어 먹는 터라서 별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이 글을 쓰기 전날도 어머니가 만두를 해주셔서 가공할 만한 양의 만두를 먹은 터다.)

 

<만두 빚기 체험. 자주 만두를 빚어본 6학년 첫째는 짐짓 별 것 아니라는 티를 내며 제가 만두 빚은 체험을 떠벌이기도 했다^^>

 

저녁을 먹고는 스차하이(什刹海)의 뒤쪽 후하이(后海, 중국에서는 뒷 후자를 임금 후자로 쓴다) 유원지를 거닐었다.

청나라를 지배한 만주족들은 이런 호수를 바다라고 불렀다.

아마 큰물을 보지 못한 만주족들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굉장히 화려한 유흥지였고, 어디나 물가에 사람 몰리고 유흥가가 형성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미녀 가수들의 라이브 공연을 앞세워 손님을 모으는 스차하이의 주점들>

 

그보다 눈에 띄는 것은 이 가게들이 '운남풍'을 앞세워 주점이나 카페를 특색화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중국인들에게도 운남(윈난)을 여행하는 것은 큰 희망사항이고, 운남의 샹그리라에 대한 동경도 큰 모양이었다.

아마 답답한 도시생활에 대한 피안처로 운남을 생각하는 듯 싶었다.

물담배를 피워물면서 이 북경의 젊은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지.

나도 다음 공정여행지로 운남을 가고 싶다는 생각도 더불어 들었다.

 

북경에 와서 처음으로 호텔에서 묵었다.

물론 크고 그럴듯한 호텔은 아니고 유스호스텔을 막 벗어난 수준의 범박한 호텔이다.

그래도 더운 물 나오고 에어콘 나오니 다시 도시의 습성이 살아났다.

일행들은 근처 양꼬치 집으로 향하고

나는 북경에 사는 동기를 만나러 나섰다.

동기를 만나는 김에 최작가의 친구인 이룡해 사장(스치하이에서 관광부스와 식당 운영)과도 한 잔 했다.

북경중앙민족대학 조선어과에서 강의하며 조선족을 위한 여러 사업을 진행하는 친구와는 참으로 오랜 세월만의 술자리였다.

여행의 피로감을 이기지 못해 밤새 이야기 못 나눴지만

가난한 연변 조선족 어린이 북경 여행 보내기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하기로 의기투합하고 헤어졌다.

우리나라 벽지의 어린이 서울 구경 시키기를 떠올리면 되리라.

이 친구와의 북경에서의 만남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흘만의 도시에서의 밤이 그렇게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