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운남(윈난)

윈난(云南, 운남) 여행기 (2015.2.21-3.1) 3

Lovecontents 2015. 4. 17. 18:10

둘째날 2. 졘수이에서 윈난 최남단에 가까운 3. 웬양으로 향했다. 

(아래 지도 참조)


 

 


고도가 낮아지면서 벌써 더워지기 시작한다.

웬양 가는 길의 거지우(个旧) 시를 지나는 길에 열대과일을 파는 상점들이 보인다.

시간이 없으니 일단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차창 밖으로 온통 바나나밭이다.

우리는 지금 아열대를 경험 중이다.

쿤밍의 봄 날씨에서 여름 날씨로 이동 중.


 

(자세히 보면 파란 봉지들이 보이는데 비닐로 감싸놓은 바나나들이다.)


웬양현은 하니족 이족의 자치주에 속해있다. 

쿤밍 여행사 소속 우리 버스 기사 양반도 이족이었다.

소수민족은 중국 인구의 약 8.5%에 불과하나, 이들이 사는 지역의 면적은 중국 영토의 약 64%를 차지한다.

넓지만 비옥하지는 않은 땅들...

하니, 이족의 자치주도 굉장히 넓은 공간이지만 사는 인구는 그리 많지 않다.

이 곳들도 상당한 고원지대인데 곳곳에 이들 소수민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한가한 고장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웬양에 도착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중국의 춘지에(春節)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로 치면 설날인데, 우리보다 훨씬 길게 쉰다.

공식적인 휴일이 7일인데, 대개 앞뒤로 시간을 더 주어서 열흘 정도씩은 쉰다.

중국 사람들도 이제 먹고 살만 해져서 긴 휴가 기간에 관광을 많이 온다.

공휴일에는 고속도로 통행료가 면제라 전부 차를 끌고 길을 나선다.

기차 타는 것보다 돈이 덜 들고 편하기 때문이다.

웬양의 멋진 풍경이 있는 지점마다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문제는 웬양이 평소에는 교통량이 많지 않아 길이 넓지 않다는 것이다.

노을이 아름다운 멍핀(勐品) 지역의 다랑이논(중국식으로는 티티엔(梯田), 즉 계단식 논)으로 가는 길은 이미 차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 중국은 자동차 질서가 잘 잡혀있지 않아 길은 이리 엉키고 저리 엉켜서 엉망이었다.

길 한 복판에서 사진 찍는다고 차 세워놓고 가버리는 것은 약과.

중앙선을 넘어 마구 추월하다가 반대편 차까지 막아버려 길은 오도 가도 못하게 되어 있었다.

중국 내륙이 처음인 일행들은 기겁을 한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무질서라서.

그러나 곧 이런 풍경에 익숙해진다. 대도시가 아닌 한 이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공안(公安)이 와서 정리할 때까지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사진 포인트까지는 1킬로도 더 남은 상황, 해도 져가고 있었다.  

노을 지는 다랑이논을 보려면 버스에서 내려 냅다 달릴 수밖에 없었다.

지는 해와 달리기 시합을 하는 기분으로 가다보니

같이 온 일행 중 부부가 같이 온 팀은 이미 포기한 상태.

홑몸으로 온 일행 셋만 포인트로 뛰어 내려갔다.

하지만 간발의 차로 해는 넘어가고, 겨우 겨우 그럭저럭한 사진 한 장 건졌다.


 

 

노을에 반짝이는 것이 바로 다랑이논이다.

멀리서 본 것이라 그 규모가 짐작이 잘 안 갈 수 있는데, 굴곡 하나 하나가 꽤 큰 논들이다.

가까이서 찍은 사진을 보면 규모를 체감할 수 있다.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을 보라. 저런 논이 수도 없이 겹치며 장관을 만들어 낸다.

웬양에 이리 사람이 몰리는 것은 춘지에(춘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맘 때 논에 물을 대고 모를 심을 준비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논에 물이 있어야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볼 수 있기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이 시기에 몰려든다.

 

버스에서 내려 걷고 전망대로 내려가고 올라가고 하느라 진이 완전히 빠졌는데

다시 버스가 서있는 데까지 걸어가야 했다.

다행히도 별이 쏟아지는 하늘이 우리를 위로해 피로를 덜어주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길을 걷는 즐거움을 찾은 셈.

간신히 숙소가 있는 곳으로 왔다. 동네 이름은 셩춘(胜村, 승촌) 승경을 지닌 동네란 뜻이렸다.

한 철 장사라 방값은 매우 비쌌고 시설은 낙후했다. 

논에 물 댈 때가 아니면 장사는 끝이니 바가지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출출한 배를 달래줄 숙소 근처 식당이 괜찮아서 다행이었다.

야참으로 돼지고기 튀김, 야채 볶음 등을 시켜 먹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은 또 일출 포인트를 찾아가야 했으니까. 새벽 5시 기상...


 

다음날, 해는 7시에 뜨는데 5시에 출발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이나 이미 차와 사람이 가득, 또 버스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야만 했다.

뚜어이슈(多依树) 전망대에 도착하니 사람이,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다.

"헌뚜어런!(很多人!)"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고 배려라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울 만 하다.

이미 좋은 자리는 다른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간신히 한 자리 잡고 해 뜨는 것을 기다렸다.

그러나 해가 구름에 가려 예쁜 사진은 건지지 못했다. 그럭저럭한 사진 또 한 장.


(저 많은 사람을 보라. 카메라를 아무리 치뜨고 찍어도 사람숲을 피할 길이 없었다...)


일출 감상하고 내려오는 길에 보니 멀리서들도 왔다.

쓰촨(사천)은 기본, 충칭, 광시를 지나 광동에서 온 차들도 보였다.


다음 포인트는 빠다(坝达) 지역.

넓디 넓은 다랑이논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지역이다.

이 정도 보면 이제 우리나라 남해의 다랑이논은 예쁘긴 하나 미니어처 정도로 느껴지게 된다.



나무가 없는 부분은 전부 다랑이논이다.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이곳의 소수민족들은 수천 년 동안 저 논들을 오르내리며 노동에 노동을 더해왔던 것이다.

경이롭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일테다.


이 경이로운 논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 정부가 만들어 놓은 하니족 민속촌이다.

멍핀, 뚜어이슈, 빠다에서 넓게 본 삶의 현장에 다가갈 수 있다.





이곳 민속촌에서 하니족의 풍습들을 자세히 읽어볼 수 있었다.

생활 공동체로, 축제를 통해 삶을 온전히 나누던 옛 삶을 볼 수 있다.

자족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었다.

몰론,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이번 여행이 다른 공정여행이었으면 아마 좀더 하니족의 삶 속으로 들어가볼 수 있었을텐데.

다분히 명승지를 중심으로 하는 '특별판'이어서 이렇게 스쳐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삶은 언젠가 이곳에 만들어진 민속촌처럼 박제화될 지 모른다.

최작가가 말했다. 이곳이 세계문화유산이 되면 하니족 농부들은 일년 내내 논에 물을 대놓고 농사를 포기할 지 모른다고.

물을 대놓고 있어야 관광객들이 몰려오니 거기서 얻는 수익이 농사를 짓는 것보다 낫겠다고 주민들이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마침 민속촌에 방송 촬영이 있다. 아이들에게 하니족 전통 복장을 입히고 이런 저런 과제를 시키며 촬영 중이다.

이 방송처럼 하니족의 현실은 사라지고 그 이미지만 남는 것은 아닌지.

나그네의 쓸데 없는 상상이길 바랄 뿐이다.



다랑이논을 본다고 사람들에 치이다 보니 사실 그 노동의 현장이 가슴에 와 닿지는 못했다.

마지막 다랑이논 지역인 롱슈빠(龙树坝) 지역에 와서야 마음이 차분해졌다.



논두렁을 직접 걸어 내려가 논들이 겹쳐있는 산과 그 굽이를 찬찬히 들여다보고서야 그곳의 삶이 느껴졌다.

수천 년 동안 산을 깍아 논을 만들고

고랑을 손보고 논에 물을 대고

대대로 모를 심고 벼를 키우며 살아간다는 것.

그 삶의 의미란 무엇이란 말인가.

하니족의 이 면면한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 무거운 질문을 뒤로 하고

드디어 웬양 다랑이논 감상은 끝났다.


이제 루어핑의 유채를 보러 갈 차례.

우리는 다시 윈난의 동부로 달려갔다.

거지우시에서 기어코 열대과일을 사먹고...

루어핑 가는 길 중간쯤 있는 미러(弥勒, 미륵)시에서 숙소를 잡고 쉬어 갔다.

최근 미륵사를 짓고 거대한 미륵불을 세우고 도시 이름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

경유지라 둘러보지는 못했다.

다랑이논의 잔상을 되새기며 잠을 청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