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연 아이폰이 화제다. 아이폰이 출시된 지 열흘 만에 가입자 수 10만 명을 돌파했고 전체 핸드폰 판매량의 10%를 넘어 팔리고 있다. 잘 팔리는 것만이 아니라 네티즌들의 주요 담론주제로 부상하면서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휴대폰 기종 하나가 문화적 아이콘으로 인식되는 경우는 처음일 것이다.
아이폰 열풍의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알짬은 아이폰으로 사용할 수 있는 콘텐츠를 담고 있는 애플리케이션 장터, 애플 앱스토어의 힘이다. 앱스토어를 개설한지 1년 반 만에 등록된 애플리케이션의 수가 10만 건이 넘었고 20억 건 이상이 아이폰으로 다운로드 되었다. 아이폰 사용자들은 가격이 저렴한 애플리케이션을 마음껏 누리며 이 새로운 모바일 미디어를 즐기고 있다. 그 콘텐츠의 풍부함은 훌륭한 카메라 기능, DMB 기능, 동영상재생 기능, 화면의 선명함 등 하드웨어의 장점을 가진 다른 휴대폰들이 넘보지 못하는 태산(泰山)이다.
앱스토어가 다른 회사들이 넘보기 힘든 경지에 다다른 것은 애플사가 추구한 비움의 전략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애플은 자사 휴대폰에 들어갈 콘텐츠를 스스로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 애플리케이션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들어와 콘텐츠를 채우도록 공간을 마련했을 뿐이다. 모바일 미디어를 즐기는 사람들이 의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수익도 7:3으로 개발자들이 더 많이 가져가도록 정해놓았다. 많이 팔리고 안 팔리고 간에 개발자는 이익의 70%를 가져간다. 덕분에 앱스토어를 연지 1년도 안 되어 80여 개국 10만 명 이상의 개발자들이 앱스토어에 자신이 개발한 애플리케이션을 올려놓았다. 그 수는 앞으로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엘리트 개발자들을 회사에 고용해서 콘텐츠를 생산할 생각을 하지 않고 전 세계 무명의 개발자들에게 공간을 열어놓는 발상이야말로 애플 CEO인 스티브 잡스의 창조적 깜냥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인터넷 시대의 회사 성장은 무엇을 채워서 전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창조적 공간을 비워두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하는 몇 안 되는 기업가 중 하나이다. 그런 깜냥이 아이팟 열풍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듯이 스티브 잡스를 디지털 미디어 시장의 ‘패러다임 시프트’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기실 세계 디지털 미디어 시장을 좌지우지 하는 미국 닷컴 기업의 힘은 무엇을 채우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시민들이 스스로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어주는 능력에서 나온다. 이베이를 보자. 이베이라는 회사는 스스로 무언가를 파는 회사가 아니다. 팔고 싶은 사람과 사고 싶은 사람이 만날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드는 회사다. 현실에서는 노점 하나 열 힘이 없는 사람도 이 가상 공간에서는 어엿한 사장이 될 수 있다. 저렴한 수수료로 그 사람은 전 세계의 고객을 만날 수 있다. 구글의 애드센스는 어떤가. 구글은 스스로 광고물을 만들지 않는다. 다만 수많은 광고주와 그 광고를 실어줄 수많은 블로거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 공터에서는 영세한 학원도 광고를 올릴 수 있고 초등학생 블로거도 광고를 달 수 있다. 실로 이 빈 공간을 통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소통하고 있다. 이베이 최고 경영자 맥 휘트먼은 이렇게 말한다. “(이베이의 철학은)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창조하자,입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것 말고도 여기에서는 무언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 최고의 닷컴 기업들이 열어 놓은 공간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잠재력을 실제의 힘으로 전환시킨다.
이런 인터넷 시대의 경향은 노자(老子)의 말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 산업화 시대에 우리는 무언가를 채우는데 골똘했다. 채우지 않으면 발전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디지털 미디어의 시대, 월드 와이드 웹의 시대에 우리는 생각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자가 말한 그대로 비어야 쓰임이 생기는 시대가 열렸다. 채우는 것이 가치 있으려면 먼저 비워야 한다. 비워야 빛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혜를 얼마나 수용하고 있을까. 이 시대의 창조가 비우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을까. 훌륭한 교육은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사람들이 자신을 비추어볼 빈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고, 멋진 콘텐츠는 사람들이 거기서 즐길 자리를 비워두는 것임을.
- <방송작가> 201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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