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에게 핸드폰 배경화면이나 벨소리를 한 번도 사준 적이 없건만, 아이의 핸드폰에는 다양한 배경화면과 벨소리가 가득하다. 또래들끼리 핸드폰 블루투스 통신을 이용해 그런 콘텐츠를 교환할 수 있어서다. 아이들이 핸드폰을 가까이 대고 조잘대며 콘텐츠를 나누어 갖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신기할 때가 많다. 콘텐츠가 저리 빨리 공간을 날아다니다니. 하드디스크 같은 물질 공간을 차지하기도 하고 빛이나 전파에 실려 다닐 수도 있는 디지털 정보의 놀라움이다. 모든 정보를 켜짐과 꺼짐이라는 단일한 기호로 대체하는 디지털의 힘. 상호 규격이 맞는 한, 디지털 정보가 가지 못할 곳이 없다. 디지털 정보는 매체를 넘어서 소통할 수 있다. 그래서 TV로 전자레인지를 켤 수 있고, 핸드폰으로 자동차의 문을 열고 시동을 걸 수도 있다. 디지털 정보로 TV와 전자레인지, 핸드폰과 자동차가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론상 모든 디지털 기기들은 소통 가능하다. ‘그들’(‘그것들’이 아닌)의 언어는 하나이니까.
핸드폰이 컴퓨터도 되고 자동차 열쇠도 되고 리모컨도 되는 컨버전스의 시대에, 정보의 손실이 전혀 없는 놀라운 소통을 이루어내는 기계들을 볼 때 놀라움 이상의 느낌이 생기기도 한다. 지금은 저들이 사람의 통제 아래 서로 소통하지만 언젠가 자기들끼리 소통하는 날이 오지는 않을까. 저 놀라운 소통능력이 인간을 위해 쓰이지 않고 기계들을 위해 쓰인다면? 불행히도 이런 황당한 상상은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기계의 인공지능은 날로 발전해가고 소통능력도 비례적으로 향상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그들을 위해 소통할 것이다.
영국 리딩대의 케빈 워윅 교수는 일찍부터 이점을 지적해왔다. 그는 March of the Machines라는 책에서 인간이 기계의 노예가 되는 2050년의 디스토피아를 묘사한다. 거기서 그는 인간이 기계의 애완동물로라도 살아남는다면 다행이라고 적는다. 이런 얘기는 여러 영화에서 익숙하게 다룬 내용이라 새로울 것은 없다. 그런데 로봇공학자인 그가 내세우는 기계지배의 이유가 남다르다. 그에 따르면 기계가 인간을 능가하는 것은 모든 기계가 인간을 뛰어넘는 지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기계들이 자신들의 작은 재능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기계들은 빛의 속도로 소통하면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는 집단 체제를 만들어 인간에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인간의 소통능력이라는 것은 참으로 보잘 것 없다. 표현하지 않는 한 그 속을 알 도리가 없고 표현을 하더라도 그것이 왜곡되거나 손실되지 않고 전달되기 어렵다. 염화시중의 미소는 고결한 성현들의 이야기일 뿐 일상의 소통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사람의 소통은 늘 얼룩진다. 그래서 케빈 위윅은 스스로 사이보그가 되려고 한다. 인간이 기계에게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기계만큼의 소통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와 아내에게 칩을 이식해서 통신하려는 그의 시도는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인간의 언어를 생체적으로 디지털 언어로 단일화하려 한다.
그러나 왜곡과 손실이 발생하는 인간의 소통방식이 불리하기만 할까. 최근의 카오스물리학자들은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했다. 소리는 소음이 전혀 없을 때보다 소음이 적당히 있을 때 더 잘 들린다는 것, 이미지는 노이즈가 전혀 없을 때보다 노이즈가 적절히 섞여 있을 때 선명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소통에서 배제하려고 했던 요소들이 실은 소통을 돕고 있었다. 생명은 완벽하지 않은 방식으로 소통할 때 긴장하며, 그렇게 받아들인 정보를 통해 더 나은 반응의 결과를 보여준다. 소통의 완벽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사람은 창조적 대응을 하게 된다. 아니 소통의 완벽성이 떨어져야만 생명은 능동적 반응을 일으킨다. 그러고 보면 창조의 어머니는 여러 소음으로 얼룩진 소통인 셈이다.
기계의 반란은 아마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인간만큼 똑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람만큼 얼룩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보의 처리 능력이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지만 그 놀라운 효율이 그들을 늘 효율적인 기능 이상의 창조로 나아가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 언어의 단일한 구조가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구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앞자리에서부터 뒷자리까지 귓속말로 낱말을 전달하는 게임을 누구나 해보았으리라. 여러 명의 귀와 입을 통하다 보면 단어는 아주 엉뚱한 것으로 바뀌어 있다. 그 변이(變異)에 우리는 박장대소하곤 했다. 왜곡이 창조적 유머를 낳은 것이다. 그러니 우리 소통의 비효율성을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비효율의 틈새에서 발생하는 창조성, 감성의 가치를 누릴 일이다. 소통하라, 오해의 여지를 열어둔 채. 창조하라, 향유의 왜곡을 즐거워하며.
- <방송작가> 201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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