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매력적인 인물이다. 가히 IT 업계의 스타라고 할 만하다. 그가 신제품을 발표하는 키노트 장면을 보려고 전 세계 수십만의 사람들이 밤잠을 설친다. 일단 그의 삶이 대단한 이야기 거리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가난하게 살다 대학을 중퇴한 사람이고, 그 어려움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인류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 ‘애플’을 양산한 사람이고(대개 인류 최초로 뭘 발명한 사람은 돌아가셔도 진작 돌아가셨어야 할 것 같은데 그는 여전히 현실 속을 누비고 있다), 자기가 만든 회사 애플에서 처참하게 쫓겨났던 사람이고, 우여곡절 끝에 회사의 CEO로 돌아와서 이번에는 인류 최초의 완전한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을 선보이고(세상에, 인류 최초의 뭔가를 두 개씩이나 만들다니!), 췌장암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고, 아이맥―아이팟―아이폰으로 이어지는 새롭고 놀라운 제품을 만들어서 디지털 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사람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애플의 최대 히트 상품이 뭐냐고 물으면, ‘아이팟도 아이폰도 아닌 스티브 잡스, 바로 그’라고 대답한다.
이것만으로도 누군가 ‘잡스빠’가 되는 것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진정한 매력을 하나 덜 말했다. 가장 최근의 아이패드 공개 키노트에서 발표를 마무리하면서 스티브 잡스는 “애플은 늘 기술과 인문학(liberal arts)의 교차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밝혔다. 사용하기 편하고, 즐겁게 쓸 수 있는 제품, 그래서 혁신적이라고 평가받는 제품들을 내놓을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인문학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문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지금의 학문 분야로서의 문학․역사․철학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스티브 잡스가 말하는 인문학은 고전적인 의미의 인간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세상을 만나는가, 인간은 무엇에 주목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변화에 적응하고 변화하려 하는가, 이 시대 인간은 무엇을 누리고 싶어 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놓치지 않고 탐구했기 때문에 단순한 테크놀로지의 향연을 뛰어넘어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테크놀로지와 인문학이 만나는 지점에 애플이 있고 IT 산업의 미래가 있는 셈이다. 기술과 인문학을 결합시키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잡스의 진짜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스티브 잡스의 이런 시각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의 일생을 거쳐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2005년 S대(한국의 S대 아님) 졸업축사에서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드러낸 적이 있는데, 그의 인문학에 대한 사랑이 오랜 세월 쌓여온 것임을 밝힌 바 있다. 대학을 중퇴한 그는, 그래서 매우 자유롭게 듣고 싶은 과목을 도강할 수 있었다. 그때 들었던 아름다운, 그러나 전혀 돈이 될 것 같지 않은 서체에 대한 인문교양과목 강의가 결국 타이포그래피 등의 미적 감각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매킨토시 컴퓨터 탄생으로 이어졌음을 밝힌다. 인간의 삶을 다루는 인문학이 쓸모없다는 편견을 버리라고 그는 강조한다. 쓸데없어 보이지만 그것에 가치가 있다면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걸어가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IT 강국이라는 우리나라가 왜 애플에게 뒤통수를 맞고 있는지에 대한 소이연이 드러난다. 기술과 인문학의 결합이 지닌 가치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정부가 닌텐도를 만들어라,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길러라, 소리 쳐도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이 토익 점수와 학점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회에서, 쓸데없는 데 기웃거렸다간 어려선 부모에게, 커선 선생님에게, 사회에 나가선 상사에게 뭇매를 맞게 되어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그것은 무리한 요구다. 인간이 어떻게 감동받는지를 알기는커녕, 스스로 예술 작품에 감동받아본 적도 별로 없고, 멋진 디자인에 숨 막혀본 적도 별반 없는 무감각한 인간을 양산하는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매력적인 제품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이천여 년 전, 공자에게 번지라는 제자가 물었다. “지혜란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지혜란 인간을 아는 것이다.”(問智. 曰, 知人.) 물론 이 말은 공자가 정치의 요체를 말하기 위해서 한 대답이다. 좋은 정치의 지혜는 인간을 아는 데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알아야 자연스러운 통치의 예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동시에 모든 분야의 지혜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인간을 아는 것, 인간이 무엇에 매료되는지 아는 것, 인간이 어디에 감동받는지 깨닫는 것,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 아는 것이 모든 일의 근본적 지혜이다. 스티브 잡스는 그 점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인문학의 가치를 놓치지 않는 한 그는 IT 산업의 생태계에서 늘 강자의 위치에 설 것이다. 결국, 문제는 인문학이다.
- <방송작가> 201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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