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지 기자인 조유식이 쓴 정도전 해설서.
기자다운 박진감 넘치는 문장을 통해 파란만장한 정도전의 삶을 실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정도전의 입문서로 모자람이 없다.
다만, 동양사상 특히 유가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덜해 삼봉의 사상을 해명하는 데는 미흡한 감이 있다.
그건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몫일테니 대중서로 훌륭하다고 평할 만하다.
기억해 둘 만한 문장을 적는다.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시대에는 서얼 출신이라도 일단 벼슬길에 진출할 수는 있었으나 고위직으로 진출하기는 어려웠다. 특히 명문거족의 서얼여인들과 혼인하는 신진 사대부가 적지 않았으나 그 자제들은 실력은 있으되 핏줄의 약점 때문에 요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이러한 신분적 한계에 대한 불만이 체제에 대한 불만과 결합해 역성혁명을 폭발시킨 하나의 에너지로 작동했던 것이다. (47)
정치가들의 부패와 타락이 극에 달했던 고려말의 혼탁한 정계는 대의명분이 뚜렷한 정치이념과 도덕적으로 깨끗한 새 정치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되었다. 이점에서 요순시대의 도덕정치를 지향하며 멸사봉공의 공인정신을 강조하는 유교이념이야말로 백성의 등골을 빼먹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구정치세력을 공격할 강력한 무기였던 것이다. (77)
정도전은 이 천인감응설을 신비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천과 인이 감응하는 데서 주동적 역할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라고 보았다. 선악의 인과응보도 하늘의 뜻이 아니라, 인간 각자의 책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의로운 자가 곤궁하고 선한 자가 화를 입는다면, 그것은 시대를 잘못 만났거나 세상에 정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지혜와 성심이 부족했을 따름이다. (125)
"인군(人君)의 지위는 존귀한 것이다. 그러나 천하는 지극히 넓고 만민은 지극히 많다. 만일 천하만민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이 생긴다. 민은 지극히 약한 존재이지만 폭력으로 협박해서는 안 된다. 민은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들이지만 꾀로써 속여서는 안 된다. 민심을 얻으면 민은 군주에게 복종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민은 군주를 버린다. 민이 인군에게 복종하고 인군을 버리는 데는 털끝만큼의 차이밖에 없다. 그러나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사심을 품고서 구차하게 해서도 안 되고 도를 어기어 명예를 구해서도 안 된다. 그 얻는 방법은 역시 인으로써만 해야 한다. 인군은 천지가 만물을 생성시키는 마음씨를 자기의 마음시로 가지고 차마 함부로 할 수 없는 마음씨로써 정치를 행해야 한다." - [조선경국전], 정보위 중 (142)
봉건천하에서 왕조를 하나 창업하는 것은 오늘날 대통령을 세우는 것에 비할 수 없이 힘든 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은 대체로 5백 년에 한 번 천시와 민심이 절묘하게 조화될 때 가능한 일이다. 정도전은 이 엄청난 대업이 당대에 자기 자신과 이성계의 힘으로 이루어지리라고 예감한 것 같다. (149)
훗날 세종이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민생안정과 문화서업, 그라고 영토확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이방원이 물려준 권력안정, 재정안정, 변방안정의 성과에 힘입은 바 컸다. (266)
다음은 [경제문감]의 한 구절이다.
"남의 음식을 먹는 자는 남을 책임져야 하고, 남의 옷을 입는 자는 남의 근심을 품어야 한다."
남의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든 옷을 입는 자는 선비다. 선비가 육체노동에 종사하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는 것은 생산대중이 그들을 부양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비는 생산대중을 책임지고 생산대중의 근심을 함께 풀어주어야 한다. 홀로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유유자적한다고 선비가 아니다. 세상의 한복판에서 백성의 근심을 함께 품고 그들을 구하는 사람이 참된 선비다. (285)
조선시대 대중국 외교의 기본노선은 사대외교였다. 이는 조선의 임금이 중국의 천자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고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며 조공을 바치는 대신, 중국은 조선을 침략하지 아니하고 외적에 대해 공동방위하며 조공에 답례형식으로 무역을 하는 쌍무적 외교관계였다. (303)
정도전은 요동출병이 단순한 정벌이 아니라 고토회복임을 역설하면서 "지난날 외이(外夷)로서 중원으로 들어가 임금이 됐던" 예들을 차례로 논했다고 한다. 즉 중원을 차지했던 거란의 요, 여진의 금, 몽고의 원도 외이요 조선도 외이인데, 그들이 이룬 일을 조선이라고 못 이룰 바 있느냐는 얘기를 한 것이다. 후대의 적지않은 조선 선비들이 화이사상(華夷思想)에 젖어 스스로를 오랑캐로 비하했던 데 비하면 정도전의 생각은 가히 '화이동일론'이라 평할 만하다. 조선이 중국에 꿀릴 것이 무엇이며, 조선이라고 중원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리라는 법이 있느냐는 이 담대한 주장은 조선사 500년에 빛나는 독보적인 자주사상이다. (351-352)
정도전이 죽은 다음해 명나라에서는 주원장의 손자인 2대 황제 혜제와 혜제의 삼촌 연왕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정도전이 예감한 대로 주원장 사후의 명나라는 극심한 권력교체기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1399년부터 시작된 내전은 3년의 세월을 끌며 명나라 조정을 마비시키다가 1402년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연왕이 조카 혜제를 죽이고 3대 영락제로 즉위하고서야 끝을 맺었다. 정도전이 조금만 버티고 살아 있었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379)
- 그러나 과연 그때 요동을 얻었다한들 지킬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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